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휘트니 휴스턴 (문단 편집) === 영향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tMyuiaZkh4)]}}} || || {{{#47403a 202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정 기념 영상}}} || '[[디바]]'라는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이던 용어를, 최초로 대중음악계에 도입한 이도 바로 휘트니 휴스턴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2020년대]]까지도 '디바의 원조'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소위 '3대 디바'인 [[셀린 디옹]]과 [[머라이어 캐리]]의 팬들은 디바 칭호를 두고 끊임없이 치고받아 왔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점은 최초라는데 있다. 현대에 와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아한 롱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고급스러운 발라드를 부르는 뛰어난 가창력의 여가수'를 평론가와 대중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 휘트니 휴스턴이기 때문이다. 즉, 휘트니는 디바의 전형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휘트니 이후 연이어 세계적인 디바 가수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90년대 '디바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컨템퍼러리 R&B]]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장르의 시초이기도 하다. 휘트니 휴스턴은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가스펠]]과 [[소울 음악|소울]]을 결합한 흑인 창법으로 당시 음악계에 부재했던, 그러나 대중들이 갈망했던 [[어덜트 컨템퍼러리]]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냈다. 이는 당시 팝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으며 1집 《[[Whitney Houston(음반)|Whitney Houston]]》과 2집 《[[Whitney(음반)|Whitney]]》의 성공을 이끌었고, 종국엔 컨템퍼러리 R&B 장르를 탄생시켰다. [[http://ch.yes24.com/Article/View/19093|#]] 그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는 초창기 컨템퍼러리 R&B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곡이며, 이 장르의 역사를 짚을 때 빠지지 않고 꼽히는 상징적인 곡들 중 하나이다. 또한 이 장르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인물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세계적인 탑스타였던 휘트니의 아성에 맞설 대항마로 당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CEO였던 토미 머톨라가 발굴한 신인 가수가 바로 머라이어 캐리이다.] 그와 함께 9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이런 이유로 휘트니 휴스턴은 컨템퍼러리 R&B의 시조로 여겨진다. 위에서 보듯이, 휘트니 휴스턴은 컨템퍼러리 R&B 장르를 탄생시킴으로써 [[R&B]] 장르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에 다수의 음악 평론가들은 휘트니의 R&B 장르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다. 휘트니는 2014년 "알앤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틀: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R&B 아티스트]] 9위, [[틀:Essence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R&B 아티스트|Essence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R&B 아티스트]] 6위 등에 선정되었다. 대중음악 최초의 디바답게 휘트니 휴스턴은 현존하는 세계 탑 아티스트들 거의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3대 디바로 같이 언급되던 [[셀린 디옹]], [[머라이어 캐리]]에게까지도 말이다! 그가 특히 큰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들은 바로 흑인 여성 가수들이다. 휘트니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있던 1980년대에, 흑인 여성이라는 매우 불리한 정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계에서 백인 남성들 뺨치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기존 음악계에 존재하던 흑인, 여성을 향한 유리천장을 깨부숨으로써, 후대 흑인/여성 가수들이 대중음악계에 진출 및 성공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놓았다. 실제로, 휘트니 휴스턴이 1집 《[[Whitney Houston(음반)|Whitney Houston]]》으로 성공을 거둔 후부터 음악계에 다양한 흑인 여자 가수들이 진출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대표적 예시가 [[자넷 잭슨]][* 실제로 자넷은 1,2집은 모두 실패하다가, 휘트니가 85년 1집으로 대성공을 거둔 이듬해인 86년 [[Control(음반)|3집]]부터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 시기 자넷이 잭슨 패밀리로 부터 독립해 스스로의 음악적 세계관을 구축했다는 점이 성공 요인이지만, 흑인 여가수의 위상을 뒤바꿔버린 휘트니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자넷은 89년 4집까지 히트시키며 휘트니와 함께 8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가수였다.], [[아니타 베이커]], [[머라이어 캐리]],[* 흑백 혼혈이다. 그 당시 미국에는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이 잔재했었는데, 외형이 백인에 매우 가깝더라도 한 방울의 흑인 피라도 섞였다면 흑인으로 여겨지곤 했다. 또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흑인]]으로 규정짓기도 했다.] [[메리 제이 블라이즈]], [[토니 브랙스턴]], [[TLC]], [[Brandy|브랜디]], [[모니카]],[* 흑백 혼혈] [[비욘세]], [[앨리샤 키스]], [[리아나]], [[제니퍼 허드슨]] 등등. 그 중에서도 가창력에 비중이 있는 가수에게는 더욱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아래는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목록이다. ||<-3>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 || || [[로버타 플랙]] || [[마이클 잭슨]] || [[아레사 프랭클린]] || || 시시 휴스턴[*친어머니] || [[샤카 칸]] || [[글래디스 나이트]] || || Darlene Love[*대모 (godmother)] || 디디 워윅[*사촌] || 디온 워윅[*사촌] || ||<-3>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준 사람들 || || [[셀린 디옹]] || [[머라이어 캐리]] || [[토니 브랙스턴]] || || [[레이디 가가]]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브리트니 스피어스]] || || [[P!nk]] || [[비욘세]] || [[앨리샤 키스]] || || [[Adele|아델]][* [[https://www.youtube.com/watch?v=QrclyqQ6zvk|#]]] || [[리아나]] || [[아리아나 그란데]] || || [[메리 제이 블라이즈]] || [[Brandy|브랜디]] || [[Monica|모니카]] || || [[제니퍼 허드슨]] || [[데스티니스 차일드]] || [[제시 제이]] || || [[켈리 클락슨]] || [[아니타 베이커]] || [[제시카 심슨]] || || [[리오나 루이스]] || [[샘 스미스]] || [[니콜 셰르징거]] || || [[시에라(가수)|시에라]] || [[넬리 퍼타도]] || [[아샨티]] || || 데보라 콕스 || 라우라 파우지니 || [[앤 해서웨이]][* [[https://www.lipstickalley.com/threads/anne-hathaway-says-whitney-houston-is-the-musical-artist-whose-affected-her-career-the-most.4937546/|#]]. 앤 해서웨이는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로 휘트니 휴스턴을 꼽았으며 그 이유로 '자신의 데뷔작인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그녀의 목소리를 '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극찬했다.] || || [[손승연]] || [[박정현]][* [[https://www.youtube.com/watch?v=2VNxdVnQ5c0|#]]] || [[에일리]] || || [[백예린]] || [[박진영]] || [[양파(가수)|양파]] || || [[박기영]] || [[이영현]] || [[제이미(가수)|제이미]] || || [[옥주현]] ||<-2> || ||<-3> 그 외 국내외로 노래 잘 부르는 여자 가수들 중 영향 받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 || ||<-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hitney_Houston#Influence|#]] [[https://www.youtube.com/watch?v=4OoyYUwFKDI|#]] || [[마이클 잭슨]], [[프린스(음악가)|프린스]], [[조지 마이클]]과 같이 큰 인기를 끌던 여성 가수들이 흔치 않았던 [[1980년대]]에 휘트니 휴스턴은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싱글과 앨범을 발매하는 족족 성공시켰다.[* '7연속 발매 싱글 1위 달성', '여자 가수 음반으로서 최초의 [[빌보드 200]] 1위 데뷔', '한 음반에서 4개의 1위 싱글 배출', '여자 가수 음반으로서 최초의 [[빌보드 200]] 연말차트 1위 달성' 등 휘트니의 대표 기록들 상당수가 80년대 때 성취되었다. 데뷔하자마자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부분.][* [[2020년대]] 시점에서, 휘트니는 프린스, 조지 마이클, [[필 콜린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라이오넬 리치]] 등 80년대 대성한 쟁쟁한 남성 가수들을 제치고 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마돈나(가수)|마돈나]]와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 가수가 되었고, 1980년대에 남자 가수들에 필적할 만한 인기를 얻었던 둘 뿐인 여성 가수로서 남게 되었다.[* 그 외의 인기를 누린 가수는 [[자넷 잭슨]], [[폴라 압둘]], [[샤데이]]가 있으나, 이들의 80년대 판매량은 1천만 정도로 휘트니와 마돈나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이 중 자넷은 1990년대에 여자 댄스가수로는 마돈나와 투탑체제를 유지하며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1990년대]]에는 스스로가 주도했던 [[R&B]] 열풍과 맞물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가창력이 좀 더 크게 조명받으며 팝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휘트니가 90년대 음악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디바의 전형을 제시하고 [[컨템퍼러리 R&B]] 장르의 탄생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으며, 흑인/여성 가수들의 대중음악계 진출길을 닦아놓음으로써 1990년대 음악계의 전개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컨템퍼러리 R&B]] 장르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장르였으며 또 대형 여자 솔로 가수들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속칭 '디바 시대'가 펼쳐졌다. 또 80년대에 비교적 적었던 흑인 여성 가수들이 휘트니 휴스턴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90년대부터 서서히 대중음악계에 진출하게 된다.][* 속칭 '디바 시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90년대 중반(95년 말 - 97년). 이때 차트 상에서 '디바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당시 빌보드 1위를 머라이어의 "[[Fantasy(머라이어 캐리)|Fantasy]]" (8주) - 휘트니의 "[[Exhale (Shoop Shoop)]]" (1주) - 머라이어 & [[보이즈 투 멘]] "[[One Sweet Day]]" (16주) - 셀린 디옹 "Because You Loved Me" (6주) 순서로 3대 디바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토니 브랙스턴]]이 "[[Un-Break My Heart]]"로 빌보드 11주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끌었고, [[자넷 잭슨]]과 [[마돈나(가수)|마돈나]]는 컴필레이션 음반 활동으로 중박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었다.][* 앨범 활동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1993년]] 역시 휘트니(''[[The Bodyguard OST]]''), 머라이어(''[[Music Box]]''), 셀린(''The Colour of My Love''), 마돈나(''[[Erotica]]''), 자넷(''[[janet.]]'')이 동시에 활동했던 시기였다. 사실 이때 머라이어와 자넷은 자체 앨범 최고판매량을 올렸으나 휘트니가 워낙 압도적 전성기를 누렸던 시점이라 덜 부각되었고, 셀린은 아직 신인이었고, 마돈나 역시 커리어 침체기에 들어서는 시점이었기에 잘 부각되지는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3LHCOZ3DBMVWBXQ5VTDJ3HP2U.jpg|width=100%]]}}} || || {{{#47403a 1988년 뉴욕 자선 행사에서 마이클 잭슨과}}} || 80년대에 두 사람에 의해서 흑인 뮤지션의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데, 남자는 마이클 잭슨, 여자는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성, 가창력, 댄스, 세트와 무대, 뮤직 비디오까지 완벽하게 결합된 '엔터테인먼트' 자체를 상징한다면[*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휘트니 휴스턴은 압도적인 가창력을 상징한다. 휘트니 휴스턴은 백인 취향으로 여겨졌던 (소위 MOR이라고 하는) 고급스러운 [[발라드]] 음악을, 그 어떤 백인 여가수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가창력으로 불러냈다. 아무리 곡을 모방하거나 스타일을 모방한다고 해도 휘트니 휴스턴의 가창력만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휘트니 휴스턴 자신이 "[[I Will Always Love You]]"를 리메이크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을 모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_lCmBvYMRs)]}}} || || {{{#47403a 휘트니 휴스턴 - The Star Spangled Banner}}} || 휘트니의 예술성과 영향력을 볼 수 있는 가장 단적인 예인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 제창. 이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레전설 중의 레전설로 유명하다. [[https://www.google.com/amp/s/www.billboard.com/music/music-news/super-bowl-national-anthem-performances-whitney-beyonce-6867098/amp/|빌보드 선정]] 슈퍼볼 국가 퍼포먼스 1위, [[https://www.google.com/amp/s/nypost.com/article/the-10-best-super-bowl-national-anthem-performances/amp/|뉴욕포스트 선정]] 슈퍼볼 국가 퍼포먼스 1위, [[https://www.google.com/amp/s/amp.theguardian.com/music/2015/jan/28/us-national-anthem-best-worst-versions-super-bowl|가디언지 선정]] 역대 최고의 국가 퍼포먼스 Top5,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super-bowl-national-anthems-whitney-houson-10706/|롤링스톤 선정]] 슈퍼볼 국가 퍼포먼스 Top11. 슈퍼볼 역대 최고의 국가 퍼포먼스일 뿐만 아니라 역대 최고의 국가 커버로 여겨진다. 아예 휘트니의 국가 버전을 [[https://www.google.com/amp/s/ktla.com/news/the-best-super-bowl-national-anthem-performance-of-all-time-was-lip-synced/amp/|역사상 최고의 슈퍼볼 국가 퍼포먼스]]라고 소개한 기사가 있을 정도이다. 워낙에 상징적인지라, 이 퍼포먼스를 VH1에서 2003년에 "TV를 뒤흔든 100가지 순간" 12위에 선정했을 정도이다. 휘트니에 대해서 뉴스 보도나 프로그램, 다큐가 편성되어도 반드시 소개되는 공연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이 노래를 부른 뒤부터 국가를 부를 수 있는 모든 여가수들은 무조건 휘트니의 버전을 참고한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로는 빌보드 Hot 100 6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91년 2월 열린 제25회 [[슈퍼볼]]에서 제창한 이 국가는 휘트니 이후 대형 이벤트에서 불리는 국가 스타일 그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 버전을 위해 박자는 기존의 3/4 박자에서 4/4 박자로 편곡해 한음 한음 곱씹어 부를 수 있게 바뀌었고, 대대적인 가스펠 풍 편곡이 가미됐으며 하이라이트 부분인 "free" 부분에서 가성 애드립을 처음으로 선보인 곡이다. 이 노래가 나온 뒤부터 대형 행사에 등장한 미국 국가에서 이 애드립이 빠진 적이 거의 없다. 곡이 대중에게 인식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2018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Whitney"(한국에선 8월 23일에 개봉)에서 해당 곡을 편곡한 작곡가의 인터뷰가 실렸다. [[마빈 게이]]가 1983년 NBA 올스타전에서 불렀을 당시 특유의 느낌을 살린 것에 감명받았고 흑인 음악의 느낌을 살려 휘트니가 곡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QNydcwDriuU|마빈 게이 버전 들어보기]]. 그런데 당시 반주를 맡은 밴드의 반응이 매우 안 좋았고, 설상가상으로 휘트니는 노래를 부르기 직전까지 편곡된 버전을 들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들어보고 나서 바로 부른 버전이 최종본이었다고. 과장이 섞였을 순 있겠지만 연습을 많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각적으로 음악을 살린 것은 맞는 듯.] 립싱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공식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변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립싱크였음을 인정한 바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라이브 느낌을 낸 '사전 녹음'. 사실 음향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기장에서, 그것도 국가 제창과 같은 중대한 행사의 경우 립싱크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큰 흠이라고 할 것은 못 된다. 다만 92년 당시는 [[밀리 바닐리]]의 립싱크 파동 (91) 직후였기 때문에 립싱크에 대한 미국 여론이 살기등등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밀리 바닐리야 다른 보컬이 녹음한 앨범으로 립싱크만 한 것이라 문제가 되었지만 휘트니의 경우는 사전 녹음이라도 본인이 직접 녹음한 것이고 이후 공연을 통해 실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란 것을 증명해 보였다. 역대 슈퍼볼 국가를 제창하면서 츄리닝에 머리띠만을 두르고 나온 유일한 사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L3FdTKhzZWU|#link]] 원래 미국 국가는 가사에 서린 인종 차별과 노예 제도의 이미지 때문에 흑인에게 꺼려지는 노래였다. 그런데 가장 보배와도 같은 흑인 디바가 미국을 대표해 이 곡을 부름으로써 흑인이 국가를 부르는게 자랑스러워지는 효과를 낸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휘트니 how will i know.jpg|width=100%]]}}} || || {{{#47403a 휘트니 휴스턴의 1980년대 뮤비속에서의 모습}}} || 본인이 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엄청난 성공은 흑인 사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보수적인 80년대 사회상에도 불구하고 MTV에선 휘트니의 뮤직비디오가 주구장장 나와댔고, 이런 성공은 미국 뿐만이 아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휘트니가 모든 가수들을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흑인들에 대한 업계 대우는 달라졌다. 다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인권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의견과 달리, 휘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가수 데뷔 전 모델 활동 시기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공과 거래하는 에이전시와는 계약을 하지 않았다. 1988년 6월 11일, Moment of Truth World Tour 유럽 일정 중에는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당시 투옥 중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참여했다. 72,000명 이상의 관중들이 입장한 이 콘서트는 전 세계에서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했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며 10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된 거대한 행사였다. 그 해 8월에는 뉴옥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흑인연합장학재단(United Negro College Fund)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2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94년 10월, 휴스턴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공에서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의 미국 방문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여 "Love's in Need of Love Today", "People", "Greatest Love of All" 과 같은 곡들을 불렀다. 또한 1994년 11월,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선출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의 세 개 도시에서 Whitney - The Concert for a New South Africa로 이름 붙여진 세 번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휴스턴은 만델라의 선출 이후 새롭게 통합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첫 번째 주요 뮤지션이었고, 이 공연은 만델라 취임식 이후 가장 크게 펼쳐진 미디어 행사로 간주되었다. 세 번의 공연 가운데 11월 12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뤄진 콘서트는 HBO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공연 수익은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선 활동을 위해 기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